[어느 PD의 고백 ⑨] 6년차 막내가 OBS 선배들에게 건네는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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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PD의 고백 ⑨] 6년차 막내가 OBS 선배들에게 건네는 위로
[어느 PD의 고백 ⑨] 임재형 OBS PD의 고백
  • 임재형 OBS PD
  • 승인 2017.02.24 16: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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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희망퇴직을 하셨다. 입사하신지 20여년이 조금 넘었을 때의 일이었고, 나는 이미 대학생 때의 일이었다. 나는 그날을 비교적 잘 기억하고 있다. 어머니께서는 담담한 어조로 전화하셨고, 상황을 설명하셨다. 그리고 아버지께 그동안 수고하셨다고 말씀드리라고, 그리고 이제 우리 가족 모두가 아버지께서 기대실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하셨던 것 같다. 그 때는 그럴 때였다. 우리 집 말고 벌써 여러 집의 아버지들이 희망퇴직 혹은 정리해고를 당하셨다. 우리나라에는 IMF의 광풍이 불고 있을 때였다. 다만 우리 집의 차례가 됐을 뿐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지고 계셨던 짐들이 가족들의 어깨로 떨어졌을 때부터 우리가족은 웃음을 잃었다.

10년 후, OBS에 입사했다. 그토록 원했던 PD라는 직함을 달았다. 월급은 적었어도 괜찮았다. 이미 사회는 취업 전쟁 중이었다. 20대 대다수가 백수라는 ‘이태백’이라는 말이 유행할 때였다. 하지만 선배들은 아마도 우리들의 적은 월급이 내심 미안했던 모양이다. ‘이제는 OBS가 긴 터널의 끝을 향해 가고 있다’고, ‘바닥을 찍었으니 올라갈 일만 남았다’며 허허 하셨다. ‘니들이 우리들의 희망’이라며 잘해보자고 했다. 그러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OBS의 자랑은 가족 같은 분위기’라고. ‘지역 지상파방송사의 PD로서 그 역할을 잊지 말고 즐겁게 일하자’며 선배는 자랑스럽게 이야기 했지만, 난 마뜩찮았다. 아버지의 일을 통해, 난 회사는 가족이 아니란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지난 14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18층 언론노조 회의실에서 'OBS 정리해고 규탄' 기자회견이 열렸다. ⓒ언론노조

우리들은 터널 끝에 서 있지 않았다. 종편이 등장했고,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개국했던 tvN은 점차 투자를 늘려가며 사람들의 호응을 얻어갔다. 동시에 현장에 나가서 OBS에서 나왔다고 하면 갸우뚱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바닥을 찍었다던 회사는 점점 땅을 뚫을 기세였다. 타사는 투자를 늘려 가는데 회사는 매년 비용을 줄였고, 비용의 절감은 결국 인력의 축소로 이어졌다. 함께 일하던 프리랜서 동료들이 가장 먼저 떠났고, 임금체계의 끝 지점에 서있던 내 동기들과 한두 해 선배들이 그 뒤를 이었다. 가뜩이나 사람이 없어 몸으로 때우는 일이 많던 회사에서 더 많은 일들이 내게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작가를 줄였으니 작가가 하던 일을 내가 해야 했고, CG팀이 해야 할 일을 내가 해야만 했다.

이런 일들은 제작국에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니었다. 타부서에서 하던 일까지도 제작부서로 넘어오기 시작했고, 결국 각자가 맡아야 하는 일들이 더 많아졌다. 프로그램을 고민해야 할 시간을 물리적으로 해야 하는 일들에 뺏기기 시작했다. 우리는 점차 기계처럼 일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꿈꾸던 방송국의 PD는 나와는 먼 이야기 같았다.

이런 종류의 일은 시작되면 반복된다. 월급을 깎아서 손실을 메우는 일은 쉬운 일이다. 다른 패러다임으로 접근해야 했다. 이 지겨운 루프를 끊자며 파업을 시작했다. 다들 지상파 방송국이 이대로 가면 안 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iTV 정파 이후 3년이나 싸웠는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들 했다.

하지만 파업은 한 달을 채 넘기지 못했다. 투쟁의 결기가 될 줄 알았던 지난 3년간의 경험은 통장 잔고라는 현실에 부딪혔다. 또 개국하고 나서는 워낙 저임금이었으니 그 통장을 채울 새가 없었다.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각보다는 모자랐다. 모두 한 가정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가족들 때문에 약하다. 약한 이들은 두려움에 시야가 좁아진다. 게다가 회사는 선별적으로 차례대로 업무에 복귀 시켰다. 모두들 불안해했고 흩어지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돌아서기도 했다. 돌아선 이들은 타인에게 잔인해졌다. 가족 같다던 사람들은 서로를 의심했다. 그리고 서로를 탓하기 시작했다. 누가 일을 더 하네, 누가 일을 덜하네, 우리 업의 본질을 이야기하기 보단, 지금 당장 앞에 있는 일들이 급급해 보였다. 선배들의 모습 하나가 벗겨지니 약하디 약한 아버지들이 어깨를 늘어트리고 있었다. 당신들의 가족과 우리들의 미래를 바꾸지 말라는 몇몇 후배들의 외침은 그들에겐 공허한 이야기처럼 보였다.

회사는 시청률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비용을 줄이면서 버티는 시기이니 어떻게든 방송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던 사람들이, ‘돈이 없으면 아이디어로 돌파해야 한다’고 강변하기 시작했다. 그것만이 살길이라며 채근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그들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 게 가능하다면 전 세계에서도 손에 꼽힐만한 혁신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어쩐지 말뿐인 판타지처럼 보였다. 타사들은 플랫폼을 다각화 하고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이러저런 실험들을 하는 등 공격적인 투자를 통해 무한 경쟁 중이었지만 우리는 점차 살림이 궁해져만 갔다. 제작비가 줄더니 프로그램도 줄었다. 볼만한 프로그램이 없어지니 사람들은 더 빨리 쉽게 OBS를 잊었다. 드러나질 않으니 지역 지상파 방송국의 문제점도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OBS의 탄생을 지지했던 많은 시청자들도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2016년 재허가 위기가 찾아왔다. 선배들은 또 월급을 반납하며 회사를 살리고자 했다. 하지만 회사는 재허가 위기를 넘자마자 정리해고를 이야기 했다. 지역지상파 방송국을 지키기 위해서 마땅히 자기희생을 감내해 냈던 사람들을 정리해고 하려고 한다. 모두들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들은 OBS의 위기 때마다 본인들의 급여를 반납하며 이 방송을 지켰다는 사실을 잊었다.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 시청자들에게 대한 죄책감 탓일 게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의 원인은 우리에게만 있지 않다. 진짜로 책임을 물어야 할 곳, 화를 내야 하는 대상을 제대로 찾는 것이 경기 인천 지역 지상파 방송사의 존폐 문제를 해결할 시작점이다. 선배들은 조금 더 어깨를 펴도 된다. 그들은 그들이 해야 할 일들을 잘 해냈다.

나의 아버지는 아직도 내게는 영웅이다. 당신께서는 마땅히 본인이 해야 할 일들을 잘 해내신걸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로 인해 벌어졌던 모든 일들에 대해 나는 조금도 원망하지 않는다. 그 시대를 버텨내신 아버지를 존경한다. 선배들에게도 나의 이야길 전하고 싶다. 당신들은 죄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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