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야생에서 어슬렁거리는 늙은 사자를 지독하게 사랑했던 어느 독립PD의 비극적인 죽음이 너무 슬프고 너무 고통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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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기 전 독립PD협회장, 고 박환성-김광일 PD를 애도하며

▲ 세상을 떠난 고 박환성-김광일 PD ⓒ 한국독립PD협회

[PD저널=이홍기 전 한국독립PD협회장] 고 박환성, 고 김광일 두 PD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유능한 자연 다큐멘터리 전문 PD들이다. 이들의 취재 지역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넓고 깊다.

두 PD는 올해 10월에 EBS에서 방송될 예정인 <다큐프라임-야수의 방주>를 촬영하기 위해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떠났다가, 지난 14일(현지시각) 저녁 숙소로 돌아오던 중 교통사고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호랑이, 사자, 코끼리, 말, 원숭이 등 동물들을 다루어내는 능숙한 솜씨 또한 일품이다 보니 일본 NHK를 비롯 세계 유수의 방송사와 다큐멘터리 관계자들을 피칭 단계에서부터 매번 흥분시켰으며, 이들의 새 작품을 늘 기대하게 만들었다.

몇 명 안 되는 자연 다큐멘터리 PD 중 이렇게 유능한 인재를 잃어버렸다. 도대체 왜 이런 비극이 일어났는지 원인을 짚어보자.

박환성 PD는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출국하기 전 <야수의 방주> 제작과 관련해 방송사의 부당한 간접비 요구 관행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개선을 요구했다. 제작비가 줄어드는 현실에 나서서 목소리를 내던 PD였다.

외주 제작의 구조적 불평등은 제작진의 안전 문제로 직결된다. 방송사의 자성 없이 독립 PD들의 힘만으로는 막을 수 없는 오래된, 그리고 잘못된 관행이다. 이것이 주요 원인이다.

두 명의 PD는 제작비 절감을 위해 야간에 손수 운전해야 했고, 끼니조차 제대로 못 챙기며 강행군을 해야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고 당일에도 해가 있을 때 최대한 촬영을 하다가 너무 늦게 숙소로 돌아오는 바람에 불가피하게 야간운전을 해야만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독립PD들의 현장은 이렇게 늘 위험에 노출돼 있다. 그래서 더더욱 안타깝고 분하다. 누가, 왜 이들을 이토록 벼랑 끝까지 몰아붙여야만 했을까?

방송 외주 제작 제도는 올해로 27년에 접어들었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방송사가 우월적 지위를 악용해 독립제작사에게 불공정한 계약을 강요하는 잘못된 구조는 개선되지 않고 있다.

방송사와 제작사가 상생해야 우리 방송 산업이 균형적이고 발전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 방송사가 제작사에게 강요하는 불공정한 계약은 제작사는 물론이고 방송 산업 발전에 있어서 발목을 잡는다.

어느 나라나 방송 일자리는 한번쯤 도전하고 싶은 멋진 직업임에 틀림없다. 대학에서도 PD는 선망의 직업이다. 그러나 우리의 방송 현실은 그렇지 않다. 방송사와 제작사의 상생이 요원한 현실에서, 독립 PD들과 프리랜서 작가의 처우는 날이 갈수록 열악해지고 있다.

이렇게 엄혹한 제작 환경 속에서도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기 위해 뭉쳤던 한국독립PD협회가 설립된지 올해 10년째다.

독립 PD들은 현장에서의 뚝심과 실력을 겸비한 유능한 인재들로 성장했다. 매년 유럽 등 해외에서는 한국의 독립 PD들과 공동제작을 하고 싶어 찾아온다. 이들은 이미 세계 다큐멘터리 시장에서 매우 귀한 창작자들이다.

그 가운데 자연 다큐멘터리 분야의 박환성 PD는 단연 최고였다. 최근 세계시장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어 스케줄 잡기가 만만치 않은 독립 PD이다.

이렇게 유능한 독립 PD들이 인정받는 현실도 참 슬프다. 이들은 열악한 제작환경에서 살아남으려면 실력밖에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돈이 없으니 온몸으로 프로그램을 만들어냈기에 실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게다가 방송사의 갑질로 엉망진창이 돼버린 국내 방송 환경 때문에 해외로 진출하게 됐고, 고생 끝에 해외에서 인정받는 마냥 웃을 수 없는 현실이다. 독립 PD들의 노력만으로는 이 같은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산업 구조를 고치기에 분명히 한계가 있다. 이들이 좋은 제작 환경을 만나서 날개를 달 수 있다면, 우리 사회의 큰 재산이 될 수 있다.

또 다시 이런 불행한 사태를 막기 위해서 방송사의 외주 제작 책임 PD들에게도 당부하고 싶다.

▲ 이홍기 전 회장 ⓒ 영화 <후쿠시마의 미래> 홍보사

더 이상 방송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행위만큼은 제발 그만하자.

미디어의 출발은 ‘아름다운 세상 만들기’ 아닌가?

일부 외주 제작 책임 PD들의 악질적인 갑질에 대해 진지한 성찰을 기대하며 조속한 개선을 요구한다. 잘못된 관행인 줄 알면서도 제작사와 독립 PD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불공정한 계약을 강요하는 일을 멈추길 소망한다. 두 명의 PD가 세상을 떠났다. 독립 PD들의 열악한 처우 개선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독립 PD들을 비롯해 방송을 만드는 이 땅의 모든 PD들이 함께 고민하고 관심을 가져야 하는 중대한 사안이다.

벌써 두 PD가 늙은 사자의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여의도 바닥을 어슬렁거리는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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