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평범성’ 벗어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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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평범성’ 벗어나기
  • 강용주 인권운동가 (아나파의원 원장, 광주트라우마센터 센터장)
  • 승인 2017.10.18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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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강용주 인권운동가 (아나파의원 원장, 광주트라우마센터 센터장)] “우리는 청와대가 시키는 대로 일했을 뿐인데 부역자로 몰리고 있어요. 우리는 희생자에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실행한 문화체육관광부의 전 고위관료가 인터뷰에서 말했다. 당연히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 떠오른다. 나치의 유태인 학살을 체계적으로 관리한 아이히만은 예루살렘 재판에서 “(나는) 군인으로서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며 무죄를 주장했다. 그러나 법정은 ‘사유의 불능’, 특히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한 무능’을 지적하며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한나 아렌트는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하는 점”에 ‘악의 평범성’의 특징이 있다고 했다. ‘비판적 사유’가 결여된 ‘영혼 없는 공무원’의 무지는 한 걸음 나아가면 블랙리스트가 될 수도 있고 인류에 대한 끔찍한 범죄가 될 수도 있다.

문제는 ‘악의 평범성’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예루살렘 재판의 증인으로 나온 아우슈비츠 생존자 예이엘 디부르는 법정에서 기절하고 만다. 정신을 차린 그에게 재판장이 물었다. “과거의 지옥같은 악몽이 되살아났습니까?” 디부르가 대답했다. “아이히만처럼 평범한 사람이 그 많은 사람들을 가스실로 몰아넣었다니, 내 안에도 아이히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 2014.08.12 방송 EBS <지식채널e> '그가 유죄인 이유' ⓒEBS 화면캡처

‘악의 평범성’은 나치 독일이나 21세기 한국이나 똑같다. 공무원이 상부의 명령, 특히 최고 권력기관인 청와대의 지시를 거스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블랙리스트를 실행한 문화예술위원회 직원은 법정에서 호소했다. “2015년 청와대 · 문체부에서 내려온 지원 배제 리스트는 온전한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부조리한 명령이었으며, 민심에 반하는 이 명령을 실행하는 것은 큰 고통이었습니다.” 이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는 것은 생계와 지위, 심지어 목숨까지 내놓아야 하는 일이니 평범한 인간에게 쉽게 기대하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악의 평범성’을 용인한다면 이 사회 구석구석까지 고름처럼 스며든 부패와 불합리의 적폐를 어떻게 씻어낼 수 있단 말인가. ‘악의 평범성’, 그 악순환을 씻어내기 위해 필요한 선결조건은 무엇일까.

첫째, 부당한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법과 제도의 근거가 필요하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9개월 전, 동독 국경수비대 4명은 장벽을 넘어 서독으로 망명하려던 동독 청년 한 명을 사살하고 다른 한 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통일 후 기소된 이 군인들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변명했고 변호인도 “수비대원들의 발포는 당시 동독법에 의하면 적법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수비대원들이 ‘양심의 긴장’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총을 빗나가게 쏠 수도 있었을 것”이라며 살인죄로 15년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통일 후 독일 정부는 군인들에게 ‘내적 지휘(Innere Führung)’라는 개념을 교육하고 있다. 어떤 군인이 무고한 생명과 인권을 해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불복종의 권리가 있으며, 그런 명령을 내린 상관을 신고하라는 게 핵심이다.

둘째, 책임자를 처벌하는 게 사회적 상식이 되어야 한다. 나치 전범에 대해서는 공소시효 없이 끝까지 추적하여 처벌하는 게 독일 검찰의 원칙이다. 독일 하노버 법원은 나치수용소 경비원으로 근무한 96살의 오스카 그뢰닝에게 징역 4년을 선고했다. 아우슈비츠 경비대원 30명의 명단을 확보한 나치 전범수사본부는 경비대원으로 근무한 후 아직 살아있는 12명을 전범으로 기소할 예정인데, 이들은 대부분 90세 안팎이다. 수사본부의 쿠르트 슈림 검사는 "우리의 목적은 노인들을 가두려는 것이 아니라, 전쟁 피해자들에게 정의가 실현됐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근혜를 파면시킨 1,000만 촛불시민이 독일 에버트 인권상을 수상했다.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여 민주주의의 기틀을 회복한 우리 저력을 국제사회가 인정한 것이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관련자들은 물론, 공영방송을 사찰하고 농단한 국정원, ‘정치댓글’을 일삼은 군 사이버사령부 등 적폐의 책임자와 실무자들을 철저히 조사해서 처벌하는 일은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첫걸음으로, 당장 고통스럽더라도 병든 사회를 치료하는 과정에 따르는 아픔은 감내해야 한다.

▲ 강용주 인권운동가

블랙리스트 실무자들은 "시키니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지만 이런 사안은 ‘사회적으로 인정할 만한 수준’의 결론이 이미 나와 있다. 블랙리스트 재판부가 “상관의 명령이 위법할 경우 그 자체로 직무상 지시에 해당하지 않으므로 부하 공무원은 이를 따를 의무가 없다”는 판례를 인용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악의 평범성’이 다시는 적폐 행위의 변명이 되지 못하도록 발상의 대전환을 이뤄야 할 때다. “과거의 범죄를 처벌하지 않는 것은 미래의 범죄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란 말을 굳이 되새겨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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